'[선택일기] 프로젝트'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00531. 설득에 관하여 2010/05/31
  2. 20090507 with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2) 2009/05/08
  3. 20090426 with <안토니아스 라인> 2009/04/26
  4. 20090415 2009/04/15
  5. 20090413 2009/04/13
  6. 20080131 2009/04/13
  7. 20071222 2009/04/13
  8. 20071221 (1) 2009/04/13
  9. 20071216 2009/04/13

#1
타고나길 누군가 '가르치려 드는 것'에 격한 거부감을 가진 탓인지
나부터도 타인에게 내 생각이나 신념을 설득하는 행위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설득하겠다는 것 자체가 몹시 자신만만한 행동처럼 느껴지도 했다.

진보신당에 들어갔던 것도
옳다고 믿는 것들을 위해 내 일상을 할애하기 위해서였지
진보신당의 세를 넓혀야 한다는 각오 때문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난 이런 것들을 추구해요. 난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만
"당신의 생각보다는 내 생각이 더 맞지 않나요?"라고 설득하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었다.

어쩌면
세력을 만들어가며 남들을 설득하는 일, 그 자체에 그다지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면서 혹은 용기내지 못하면서
특정 정당의 당원이 되었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긴 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상황이 오리라 예감도 했다.
그 때가 되면, 천천히, 공을 들여 설득하리라 생각했었다.


#2
오늘 친한 회사사람 6명에게 메일을 보냈다.
6월 2일 투표에서 정당투표는 7번 진보신당을 뽑아달라는 내용을 적었다.

그렇게 해야겠다고 선택했다.
자연스럽게 저절로 된 게 아니라
굳이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할 수 있었다.
 
굳이 해야겠다고 이제야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에게 권해도 좋을만한 진짜 괜찮은 물건'이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나에 대한 존중감이 조금 더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처음에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입당이라는 정치적인 커밍아웃을 했던 것이었는데
이제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이 편이 좋아"라고 말할 여유가 아주 조금 생겼달까.
이건 그만큼 내가 스스로를 믿어준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나름대로는
신념을 설득하는 행위를 처음 했던 것이어서
모두 친한 사람들이었음에도 조금 떨렸고, 많이 조심스러웠다.


#3
저녁식사 시간에 한 선배가
"나 노회찬 싫어. 그래서 진보신당 싫어해"라고 운을 떼며 지난 경험담 하나를 들려주었다.
선거홍보문자와 관련된 소소한 에피소드였는데
선배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실제 겪은 일이라 그 마음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어쨌든 (선배 입장에선 중요했지만, 내가 듣기엔 사소했던) 빈정상하는 사건 하나 때문에
내가 존경하는 한 사람의 의미와 행보, 약속이 싸잡아 비하당하는 걸 듣고 있자니
너무너무 불편하고 못 견디겠어서
지금이 천천히, 공을 들여 설득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며
좋게 풀어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니가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내 생각은 변함 없어. 흥' 하고 덮어놓고 배척하는 선배의 마음을 열어낼 현명한 아이디어나 기지 따위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화가 치밀어 올라서 내 마음을 달래는 것조차 벅찼다.
대꾸하기 시작하면 싸울 것 같아서
싸우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듣고 참았다.
그러고 났더니 그 사람 자체에 정이 떨어졌다. 이런 건 싫은데,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덮어놓고 비난하고 싫어하는 건 싫은데, 정이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나서
타인을 설득하려고 덤벼드는 건 굉장한 애정(삐끗하면 집착. 어쨌든 상당한 에너지)을 필요로 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신경에 거슬리지 않은 영역에 치워두지 뭐'라며 잘라내는 게 아니라
굳이 내 세계로 포함시키겠다는 의지이니까.

#4
그렇다면
나는
남들을 조금 더 설득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내가 잘 알아서, 혹은 더 나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내 세계 안의 그들을 저 구석진 곳에 치워두지 않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개지려는, 기이하고도 애틋한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5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블로그에 들어와서 보니 포스팅을 거의 하지 않은 5월 동안 내 블로그의 방문객은 매일 50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설.득.이라는 것을 해야겠다면
이 공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가슴을 울리는 멋진 글을 쓰고 싶었지만
능력부족으로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멋진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 뜨거운 맛 by 김규항 (한겨레 기고 글)

more..


2010/05/31 23:21 2010/05/31 23:21
#1
<안토니아스 라인>을 보러 시네큐브에 갔을 때, '개봉하면 꼭 봐야지' 생각했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의 유료시사회에 참석하기로 선택했다. 영화도 영화였지만, 상영 후 '진중권 교수와의 시네토크' 순서가 있다기에 고민없이 내린 선택.

영화는 좋았다. 감독이 80대라던데, 영화만 보곤 80대 노인이 만들었다는 걸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박력과 감각이 대단했다. 연출, 연기도 좋았지만, 가장 경이로웠던 건 각본이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쓸 수 있지? 풍선을 불 때 터지기 직전에 느끼는 그런 류의 긴장감이 내내 느껴진다. 선혈이 낭자하는 장면으로 쇼크를 주거나, '곧 일이 터질 거야' 암시하는 음악을 깔지 않아도, 오로지 서사의 힘만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앤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와 동생 행크(에단 호크)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간 원인이
매우 작은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거다.
(미국 사회가 가정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라고도 하던데, 내가 보기엔 사회적인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영화라기 보단, '개인의 충족되지 못한 작은, 그러나 원초적인 욕망이 얼마나 큰 재앙으로 발전할 수 있느냐'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 같았다. 물론 그 욕망을 왜 충족시키지 못했느냐를 따지고 들어가면 사회 탓을 해야할 시점이 찾아오긴 할 거다. 근데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주인공의 삶을 통해 '여기에 사회 탓은 없을까?'라고 이야기 거리만 던져주고, 그 영역은 열어두는 게 '재미'면에서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악마가...>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다.)

다시 작은 욕망으로 돌아가서.
앤디는 아내와의 섹스라이프에 문제가 있고, 스트레스를 받을 땐 마약으로 도피한다. 마약 때문에 돈이 필요해 분식 회계를 했는데, 감사를 받게 되어 그걸 메워넣을 목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면의 가장 안쪽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란 것, 아버지가 동생 행크만 걱정하고 챙긴 것에 대한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 내가 느끼기엔 이 상처에서 나오는 고름이 점점 바깥으로 스며나와 일을 만든 것 같다.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지, 마음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면서 섹스가 잘 됐던 '리오'로 이민가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것이나
단호하고 강한 장남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마약을 찔러넣지 않으면 작은 스트레스도 견디지 못하는 약한 모습이 있고, 그 약한 모습은 부모, 아내, 동생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도
유년기 상처의 고름이 배어나와 만들어진 모습인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시작된
아내와의 문제나 마약 문제가
다시 바깥으로 배어나와
가장 껍데기에 보이는 문제는 돈이지만, 돈이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근데 과연
가족구성원의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100% 건강하게 채워주는 가정이라는 게 존재할까?
혹시 모든 가정 안에는 이미 비극의 씨앗이 심어있다,고 말하는 영화인가? 잠시 생각해봤는데, 이건 확실히 모르겠다. 가족은, 아무리 행복해보이는 가정이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주고 받기 마련인데, 그럼 밖으로 고름이 배어나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상처라는 게 강수량 재듯 수치화해서 '고름이 15mm 고였으니, 섹스라이프에 문제가 생기겠군요' 말할 순 없는 거고.
지금까지 생각의 결론으론
모든 가정 안에는 이미 비극의 씨앗이 심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게 진짜 비극으로 자랄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른다. 개인의 성장사에 달린 문제다. 그리고 모든 가정 안에는 비극의 씨앗이 있지만, 비극의 씨앗만 있는 건 아니다,는 게 지금의 생각.
써놓고 보니 당연한 얘기다.

#3
<악마가...>의 훌륭한 점은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도 저 정도의 결핍은 느끼는데'라고 공감할만한
작은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자라기 시작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는지
그리고
상황이 더 큰 상황을 어떻게 불러오는지 보여주는데, 그게 너무나 설득력 있다는 데 있다.
내 마음에 어떤 씨앗들이 뿌려져 있는지, 그 중 어떤 것을 골라 키울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지 않으면 앤디와 행크 형제처럼 몰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면에서 무섭고 섬뜻한 영화다.

전대미문의 가족잔혹사를 만든 앤디는 그저 아빠의 사랑을 원했을 뿐이다.

#4
진중권 아저씨의 짤막한 강의는 본인이 창피해하신대로, 별게 없었다.
이 영화가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지, <시학>에 나온 원리들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 설명해준 정도.
평균보다 약간 착한 주인공이
사소한 결점 때문에 몰락해가는 게 훌륭한 비극이고
훌륭한 비극은 '공포와 연민 효과'를 일으키는데
이 작품이 딱 그렇다,는 얘기였다.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감독이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바람에
조금 실망했다.
이후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관객의 질문이 쏟아졌는데, 미리 영화를 보면서 그 생각은 안해보셨던지, 똑 부러진 견해는 듣지 못했다.

재밌었던 사건 하나는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밝힌 사람이 "돈 문제라기보다는(진중권 교수는 돈 문제라고 가볍게 넘어갔다)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내 생각과 비슷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것에 대해 진중권 교수가 "그 부분은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조금 놓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답했고, 이후 스스로 직장인이라고 밝힌 여자가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 내 주변에도 많다. 확실히 부모님 돈 받아쓰는 사람과 직접 버는 사람과는 생각 차이가 있는 것 같다"는 안드로메다급으로 유치한 발언을 하는 바람에, 빵 터졌던 순간이 있었다.

마지막 질문자가 굉장히 센스있고 탁월한 질문을 해서 진중권 교수로부터 '건질 말'을 얻었다.
영화의 주인공이 치밀하게 계획을 짰으나 살짝 엇나간 우연 때문에 어마어마한 몰락으로 빠져드는데, 진중권 교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계획대로 온 것 같은지 아니면 우연의 산물인 것 같은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답을 하다
그가
"우연에는 용기를!"이란 말을 썼는데
요게 마음 속에 콕, 박혔다.
우연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용기를 내서 그 게임에 동참하기. 오늘의 선택.
아, 또 한가지 중요한 오늘의 선택. 작지만 원초적인 욕망들을 잘 돌보기.




2009/05/08 03:28 2009/05/08 03:28
#1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웹 서핑을 하다가 <안토니아스 라인> 재개봉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시계를 보니 상영까진 5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일말의 고민없이 후닥닥 씻고 입고 극장으로 가기로 선택했다.
정말이지, 너무나 반가운 마음 뿐이었다.
아, 정말, 안토니아스 라인이라니.

<안토니아스 라인>을 처음 본 건 대학교 3학년, 세계 종교와 문화 수업 시간 때였다.
그 과목은 외부 강사님이 맡으셨던 과목인데, 그 분의 성함은 물론 수업 때 배운 다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안토니아스 라인>을 보여주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난 그 분께 마음 깊이 감사를 보낸다.
당시에 이 영화를 보며 내가 즐겼던 감정은 '통쾌함'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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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체자 '디디'는 친오빠 '피트'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안토니아의 딸 다니엘이 삼지창을 던져 디디를 구해 안토니아의 집으로 데려오고. 피트는 영화 후반 군인이 되어 마을에 돌아오는데, '힘으로 다른 사람들 굴종시키는 걸 좋아하는, 남자 세계의 질서'를 대변하는 인물로 보였다.>


보통의 마을 사람들처럼 살지 않아도 행복한,
아니, 오히려 마을에서 조롱당하던 정신지체자, 과부, 미혼모, 레즈비언 같은 사람들이 모여 너무나 행복하게 서로를 보듬는 모습을 보면서 '거봐. 평균적인 삶이 아니라고 해서 꼭 불행한 건 아니라구.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딱딱한 생각이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니까.'라는 류의 생각을 했고, 이 영화에서 희망 그 비슷한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안토니아가 (고해성사실에선 여신도를 더듬고, 설교할 땐 "음탕함이 어쩌고..."하는) 위선적인 신부의 약점을 잡아 굴복시키는 장면이나
나중에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바스'가 안토니아에게 청혼 할 때 바스의 다섯 아들들에게 엄마가 필요하자고 하자
"나에겐 아들이 필요없는데요. 남편이요? 남편은 어디에 써먹나요. 그냥 가끔 들러 우리끼리 하기 힘든 일을 도와주세요. 난 신선한 달걀, 우유와 빵, 채소를 줄게요"라고 답하는 장면에서 '전복의 통쾌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3학년 때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아서 그랬던 것도 같고
본디 태어나길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걸 질색하는 성격이라 그랬던 것도 같다.


7년의 세월이 흐른 탓인지
오늘 영화를 볼 때 마음이 가장 많이 갔던 장면은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안토니아가 밭에 씨를 뿌리고, 짚더미를 나르고, 빨래를 삶는, 그러니까 노동하는 장면들이 마음을 살며시 일렁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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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가 마련한 유토피아에 모여든 여자들은 모두 함께 농사를 짓고, 일과 살림을 한다. 물론 바스와 그의 아들들도 이 공동체에 끼어있긴 하지만 '한가로이 노는 여자'는 영화에서 한번도 볼 수가 없다.>


관습이라고 무작정 배격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관습(그걸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한지도 모르게 만드는 관습)을 골라내는 시각을 갖추고, 그것을 박차고 나가는 용기를 보여주고, 심지어 자의로 혹은 타의로 그곳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을 보듬는 안토니아의 강인함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걸까..
오늘 영화를 볼 땐 그런 것들이 참 궁금했다.
영화가 하려는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지만
먹고 숨쉬고 사는 것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상'이 흔들린다면 아마 안토니아가 딸과 손녀를 그런 식으로 양육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안토니아가 자신의 일상을 닦고 조이는 노동을 할 때 한번도 찌푸린 얼굴을 하거나, "아, 정말 힘들어서 못해먹겠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고.
물론 일상에 충실하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깨인 시각과 용기를 갖는 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삶에 대한 존경심이다.

영화는 그 '삶에 대한 존경심'에 대한 이야길 풀어내기 위해 또 다른 핵심 인물 '굽은 손가락'을 등장시킨다. 그는 염세적인 성격으로 방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는 매우 박식한 할아버지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안토니아의 식구들만이 그를 아끼고 사랑한다.
디디를 성폭행했던 피트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를 대변했다면, '굽은 손가락'은 이성의 세계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굽은 손가락은 논리학, 수사학, 수학, 역사 등을 통달한 할아버지다. 그는 자주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우연'의 결과라는 걸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태어나길 원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태어나  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상이 나아질 거란 예상을 할 수 없고, '희망하는 오류'라는 건 종교를 가져야 생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종교라는 것도 인류의 역사를 보아하니 세상을 엉망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을 뿐이니 이 세상이 고통 그 자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영화 후반부 그는 결국 "더 이상 '생각'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을 한다.

흥미로운 건
안토니아의 손녀 '테레사'가 3-4살 때부터 '굽은 손가락'과 이런 류의 대화를 나누며, 그의 사상을 이해했고 '수학과 음악의 천재'로 길러졌다는 점이다.
테레사는 스무살이 되어 임신을 하게 되는데
'굽은 손가락'은 "아이를 낳는다는 건 너의 이기심의 발현이야. 그 아이에게 이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니?"라며 절대 반대(거의 비난)한다. 그런데 테레사는 고민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테레사는 굽은 손가락처럼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기도 했지만, 안토니아의 손녀이기도 했다. 굽은 손가락식의 세계관과 안토니아식의 세계관을 모두 경험한 테레사가 안토니아식의 세계관에 손을 들어줬다는 게 참 흥미로웠다.
이 지점에서 난 '테레사의 거수'가 곧 '감독의 거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본과 감독을 맡은 마를렌 고리스는
삶에 대한 존경심은 '삶에 대한 사유들'에 파묻혀서는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안토니아처럼 자신의 두 팔과 두 발로 직접 살아야 한다. 중요한 건 그거다. (위에서 말한 일상의 노동씬들이 내 마음에 다가왔던 건 이런 맥락에서였다.)

영화를 보다 목이 울컥, 코가 찡했던 장면이 하나 있었다.
안토니아가 증손녀 사라와 말을 타고 가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죽은 뒤 사라가 죽음에 대해 궁금해하자
안토니아는 "영원히 죽는 것은 없어.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무언가가 남는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나. 그게 인생이야"라고 답하며, 삶이라는 건 살아있으려는 것 그 자체라고 가르쳐준다.

난 사회적으로 명망있고 거창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은 예전부터 없었고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꿈이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다. 엄마가 되어 아이를 사랑하려면 내 마음 속에 꼬여있는 게 (아예 없을 순 없고) 최대한 없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엄마가 되기 전, '엉킨 곳 풀기'를 많이 해두려고 노력하고 있고.
물론 그것도 안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많이 해놓아도 막상 엄마가 되면 '엉킴 핵폭탄' 같은 게 다가올 거란 걸. 그리고 그걸 견디는 건 어마어마한 고행일 거란 걸. 그리고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란 것도. 다 아는데, 겁은 나는데, 그래도 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결혼이란 걸 해보지 않아서 용감하게 말하는 걸 수도 있는데, 어쩌나..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내가 좋은 엄마란 말을 쓸 때, 그 '좋은'이 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한다면
아마 안토니아와 매우 비슷한 모습일 것 같다.
응, 맞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안토니아 같은 여자이자 엄마이자 할머니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의 선택.
앞으로 살면서 본의 아니게 침범당하거나, 꿈을 실현하는 게 너무나 버거워서 '몰라 몰라. 좋은 엄마는 무슨. 다 그냥 이러고 사는 거야.'란 포기의 순간이 찾아올수도 있을 거다. 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무기력해지고 마음 약해지는 건 괜찮다. 영화는 영화고,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나는 안토니아가 아니니까. 그러나 상황 탓하며 내 안의 안토니아를 부정하지는 않기로 선택했다.

오늘의 선택 추가.
요즘 포스팅 길이가 장난 아니게 길어진다.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 걸텐데.. 앞서 굽은 손가락 할아버지 얘기에서 말했듯 생각만 많이 하는 건 옳지 않다. ㅋ 자꾸 보고, 느끼고, 몸을 써야지. 그런 맥락에서 <안토니아스 라인> 예고편을 몇몇 친구들에게 보라고 덧붙인다.




2009/04/26 22:06 2009/04/26 22:06

20090415

from [선택일기] 프로젝트 2009/04/15 20:19
#1
아침에 눈을 뜨니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지난 부산영화제 때 예매까지 해놓고 (데스크의 변심으로 출장이 2박3일에서 1박2일로 줄어드는 바람에) 못본 <콘트롤>을 볼까, 재개봉한 <아비정전>을 볼까 고민하다 <아비정전>을 보기로 선택했다.
장국영 추모 6주년을 기념해 재개봉했다는데
난 장국영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보다는 19년 전의 장만옥을 보러 극장에 갔다.

아침 10시 35분, 스폰지하우스 중앙.
이 시간에 극장에 온 게 얼마만이던가 기억을 되짚어봐도 직전 조조영화의 기억이 한톨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10년 쯤 되었을 거야, 감격하면서 표를 사는데 가격 4천원. "우와" 통제할 겨를도 없이 내 입에서 저런 감탄사가 툭 튀어나와 버렸다. 창피하게. 누군가에겐 '조조영화=4천원'이 당위겠지만, 그 순간 나에겐 축복 그 비슷했다. 10년간 미뤄두었던 축복을 받으며 <아비정전>을 보았다.

<아비정전>을 보는 내내 나는 울컥 울컥 솟는 반발심을 다스려야 했다.
'제발 아름답게 보여주지 마. 내 눈을 홀리지 마. 저렇게 허우적거리는 게, 싸지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저 혼돈이, 자기파괴적인 게 어디가 아름답니? 왕가위, 이 탐미주의자. 지독해. 지독해.' 뭐 이런 생각들이 계~속 이어졌달까.
왕가위가 감각을(때론 감각만) 자극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도 알고, 그의 작품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아마 내가 변했기 때문일 거다.

많은 영화들에서 혼돈 속의 청춘을 아름답게 그린다. 거칠고, 갑갑하고, 타인은 커녕 자신과의 대화도 하기 버거운 그런 불능의 상태를 아름답다고 추켜세운다. 그런 상태로 (아비처럼)돌연 죽기라도 하면, 혹여나 그게 자살이라면 선망이 커져 '아이콘'화 된다.
예전엔 나도 그런 드라마틱한 삶과 객기와 충동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정제되지 않은 파열음이 역설적으로 가장 에너제틱한 삶의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일면 멋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고리타분한 가치들을 전복시킬 때나 계산없이 달려드는 열정 같은 걸 볼 땐, 여전히.
그러나
아비는, 매우 미안하지만, 그리고 안타깝지만, 찌질하다.
친어머니와 양어머니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생긴 원초적인 결핍. 아비같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쉽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비는 너무 니힐리스트다. 너무 갔다. (아니, 아비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정확히 말하면 왕가위가 너무 니힐리스트고 너무 간 것 같다.)
아비는 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돈이 있고, 쉽게 얻은 돈으로 뭐든 쉽게 산다(buy). 여자의 마음도 쉽게 얻는다. 타인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의 무게감을 모르기 때문에 거침없이 다가간다. 그래서 두발이 땅에 굳건히 붙어있는 장만옥 같은 여자가 오히려 홀딱 넘어간다. 헤어지는 것도 쉽다. 여자가 못 버티고 나가 떨어지면 문 닫고 바이바이. 주변 사람들에겐 늘 민폐다.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아냐'며 목숨 내놓고 다니니까 '삶에 대한 성의와 인지상정'이 있는 경찰(유덕화)이 대신 칼맞는다. '내 것, 내가 가졌다, 내가 아낀다...'이런 애착이 없다. 그렇게 길러질 수 밖에 없었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래서 아비의 눈은 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허공 어딘가에서 답을 찾는다.

필리핀으로 친어머니를 찾으러 갔다 퇴짜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만약 친어머니가 만나주었더라면, 아비가 달라질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 아니었을 것 같다. 친어머니가 만나주었더라도 아비는 그렇게 기차 안에서 죽었을 거다. 아마도.
왕가위가 못마땅한 건 이 때문이다.
'이래도 저래도 난 이 허무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이 안에서는 죽음도 유별난 사건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걸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들다니, 괘씸해. 정말.



#2
영화를 보고 치료를 받으러 한의원에 갔다. 물리치료실에 누워 전기치료를 받는데, 힐끗 옆으로 어떤 기계 위에서 '운동' 중인 아저씨가 보였다. 누워 있으면 상반신 쪽 침대 양쪽이 아래위로 움직여 허리 근육을 풀어주는 기계.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자의와 상관없이 '또르르' 굴러 다니게 되는 기계라, 살짝쿵 민망한 기분에 빠져들게 되는 그런 기계다. 그 위에서 성의가 가득 찬, 온전히 집중한 표정으로 운동에 임하고 있는 그 분을 보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적합한 연상인지 모르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 <하루키 일상의 여백>에서 '귀여운 페이스, 진지한 눈빛으로 교미 중인 다람쥐' 사진을 봤을 때 느꼈던 기분이 생각났다.
"어이구~ 그랬어요? 잘하고 있어요"라고, 애정 담긴 손길로 엉덩이 툭툭 때리면서 말하고 싶은 그런 기분. 삶을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이 예뻐서, 대견해서...
따땃하게 뎁힌 전기치료기 위에서 잠깐 생각했다.
한의원에서 열심히 치료받는 아저씨에게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해
눈을 홀리게 표현해내는 영화가 나오면 참 좋겠다고.



#3
얼마 전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맞춰지지 않는 퍼즐 한 조각이 있었다.
일기장과 읽는 책에 시와 분, 초까지 적을만큼 난 매순간 충실하게 살고 싶었다. 마음에 애매하게 남아 있는 감정은 한 톨도 없길 바랐다. 그 이유는 죽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고. "나, 아마 내일쯤 죽는다고 해도 별로 후회가 남진 않을 것 같아"라고 몇몇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늘 그런 생각이 머리 한 켠에, 작게, 그러나 끈질기게 붙어 있었다.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 '사람은 누구나 죽어'라는 당위로서가 아니라, 체험으로서, 현실로서.

이게 의문이었다.
왜 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유년기, 부모님, 언니, 날 때부터의 성향, 친구들, 연애 등등 이리 파보고 저리 파보며 나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폭이 넓어져도 저 의문만큼은 풀리지 않았다.
열심히 살고 싶어하는 건 좋은데, 왜 그 마음이 죽음으로부터 출발했을까.

엊그제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갑자기 퍼즐이 맞춰졌다. 여기서부턴 참 풀어내기 어려운데..어쨌든 해보면..
난 삶의 끝을 생각해두지 않는 게 싫었다.
그건 역설적이게도 언젠가 끝나버릴 거란 사실이 주는 공포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끝나, 끝나' 다독여줘야
그제야 용기를 내어 기뻐하고 욕망하고 뛰어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건
다시 보면
내가 그만큼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다.

손에 쥐어진 사탕이 없어질까봐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사탕은 결국은 다 없어지는 거야,라고 다독여줘야 그제야 용기를 내어 맛보고 기뻐하는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는 사탕의 맛을 한톨도 놓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매달렸다. "맛은 있지만, 눈물이 계속 흘러요."라고 아이가 말했다. 내 마음 속에서.

아이는 사탕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난
분명
사탕을 입에 넣고 맛을 보면서도
천천히 녹아 사라진다는 사실에 너무 슬퍼만 하고 있던 건 아닐까.
시간에 대해 예민한 것도
사탕이 얼마나 녹고 있는지 끊임없이 체크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추억을 의미있게 여겨왔던 건
사라진 사탕이 입 안에 남긴 맛을 되새김질하며
사라진 부분에 대한 상실감을 위로할 수 있어서였고.

벼락처럼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코가 찡해졌다.
그건 틀린 생각이 아니란 신호였다.
'이런 거였구나'
생각이 직관을 겨우겨우 쫓아가 깨닫게 되었을 때
늘 코가 찡해지곤 했으니까.

그래서 뭘 어떻게 살겠다는 다부진 결심이 생기거나, 24시간 마음에 사랑이 넘치는 상태로 하하호호 살게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비교적 큰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내게 사탕을 주었는지 생각해보고, 사탕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기.
그리고
"맛있다"라고 말하며 울지 말기.
"맛있다"라고 말하며 기뻐 하기.

2009/04/15 20:19 2009/04/15 20:19

20090413

from [선택일기] 프로젝트 2009/04/13 00:53
#1
아무 생각없이 만들었던 블로그의 분류를 바꾸기로 선택했다. 과거 싸이에 올렸던 낙서 중에서 '[선택일기]프로젝트'는 이곳에 옮겨왔다. 내가 내린 작은 선택을 관찰해보면, 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결국 큰 선택을 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당초의 의도를 버리기 아까웠다.
블로그를 들락거리며 새삼 깨닫는 점은
(이것도 오늘의 선택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넘겼을 이야기다)
오프라인의 일기장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 폭발적으로 쓰여지고
온라인의 일기장은
연애를 하지 않을 때 거의 쓰여진다는 것이다.
오프라인의 일기장과 온라인의 일기장을 대할 때, 내 태도가 달라지는지 생각해보았는데
주변인들의 실명 언급을 빼곤 크게 달라지는 게 없었다.
온라인에서 누군가 읽는 게 영 거북한 일기는 비공개로 쓰는 걸 감안하면
사실 이곳에 공개하는 일기는 진짜 일기라기보단
편지에 가까운 것 같다.
일기에 가깝게 나름 용기내 쓴 솔직한 편지. 누군가 읽어줬으면 해서 쓰는 편지. 그리고 결국은 시간이 흐른 다음 내가 다시 읽어줬으면 해서 쓰는, 그런 편지.

#2
김승옥 전집 1권 <무진기행>을 다 읽기로 선택하고, 결국 다 읽었다. 책에 밑줄을 하도 많이 쳐서 옮겨 적으면 거의 필사 수준이 될 것 같다. 그래도 날 밝는대로 몇 줄을 옮겨 적어보기로 선택했다. ([도서관] 카테고리는 이 목적으로 새로 만들었다)
예민한 문장 때문에
읽는 동안 머리 속에서 '뎅뎅' 종소리가 들리는 책들이 있다.
오정희, 신경숙, 김승옥.. 탁월하게 설계된 드라마나 이야기도 좋지만 그보다는 뭔가 습하고 내밀하고 날카롭고 처연한 그런 문장에 내가 무척 끌린다는 걸 새삼 발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책을 읽을수록 이상이 높아져 현실의 내 문장(이럴 땐 그분들 글에 사용한 '문장'이라는 똑같은 단어를 갖다 붙이기도 진짜 민망하다. 문장은 문장이지만 내 것은 그냥 '투정 나부랭이' 정도로 부르고 싶어진다.)이 너무나 초라해진다는 것이다.
난 대단한 작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어마어마한 걸 남기고 싶은 것도 아닌데...
라고 늘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난 글을 대.단.히. 잘 쓰고 싶은 건지도 몰라, 라고 잠시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그동안 글 쓰는 연습이라는 건 해본 적이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낙서 밖에 하지 않았으면서
작가 뿐 아니라 내 주변의 글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마냥 부럽고 열등감 느끼고 그랬던 것 같다.
나에겐 세상이 촉감, 색, 맛, 소리..이런 감각들로 기억되는데 (그래서 서사보단 묘사가 편하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글 쓰는 연습은 무엇일지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고민해보기로 선택했다.
2009/04/13 00:53 2009/04/13 00:53

20080131

from [선택일기] 프로젝트 2009/04/13 00:07
요즘
마음 속에서 되새김질을 미루고 있다.
이런 것도 '선택'으로 봐야할 지 조금 헷갈린다.
오늘의 선택은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새벽을
마음을 서걱서걱 하게 만드는 시간의 촉감을
그냥 받아들이자는 것.
나를 그 안에 혼자 두자는 것.
내 마음 근육의 지구력을 기르는 시간.
버티기, 먹먹함, 시간이 피부 안으로 스미는 느낌.
그걸 그냥 받아들이기.
오늘의 선택.
2009/04/13 00:07 2009/04/13 00:07

20071222

from [선택일기] 프로젝트 2009/04/13 00:07
#1
이번 집에 이사오면서 많은 것을 버렸는데, 카테고리 자체를 삭제한 품목이 있다. 요리에 필요한 양념류들이다. 사소한 거 뭐라도 하나 만들어 먹으려면 간장, 국시장국, 다시다, 고춧가루, 소금, 맛소금 등등 종류는 종류대로 갖추어야 하는데 정작 몇번 쓸 일이 없어서 매번 유통기한이 지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않기로 선택했었다.
그래놓으니
이따금 내가 끓인 만두국에 밥을 먹고 싶은 날에도 간장, 소금, 파, 계란이 없어서 끓여 먹지 못하고 무언가를 시켜먹는 일이 발생했다. 기본 양념을 갖춰놓으면 될 일이었지만
내가 언제 또 해먹겠나, 어차피 다 버리게 될 거다 싶어 그냥 넘기고 넘겼었다.
그리고 나를 주방일(이렇게 부르기도 민망한 초보적인 생명유지 행위)로부터 도망치게 한 또 다른 이유는 음식물 쓰레기였다.
어릴 때부터 비위가 무척 약해서
엄마가 음식물 쓰레기 비닐을 바꾸려고 풀석거리시는 걸 곁에서 목격이라도 하면 "우엑~" 헛구역질이 반사적으로 나왔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었다.
집에서 음식을 해먹으면 당연히 나오는 음식물쓰레기. 그걸 들고 내려가 언제 비웠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음식물쓰레기 분리수거통의 뚜껑을 열고 진동하는 쓰레기 썩는 냄새를 참아가며 그 안에 부어 넣는 행위는 나에겐 '무리'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음식물쓰레기를 아예 만들지 않으려고 했었다.
바나나 껍질, 차를 끓이고 남은 옥수수알이나 박하 입사귀, 치킨을 먹고 남은 뼈 정도가 우리집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의 전부였다. 그런 것들은 비닐봉지에 넣어 꽉 묶은 다음 일반쓰레기 봉투 안에 넣어 함께 버렸다. 내 머릿속에서 '그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나온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야'란 생각이 있었고, 그게 분명 핑계로 작용하게 내버려두었고, 분리수거를 하지 않았다는 자책에 시달릴만한 양의 음식물쓰레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환경보호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어쨌든 이러했는데
대전에서 올라온 친구가 집밥을 먹게 해주겠다며
이런저런 양념류와 대파(우리집에 대파가 들어온 건 거의 1년만이다!), 숙주(숙주는 처음이다!), 김치, 두부, 콩나물 등등을 사와 요리를 해줬다.
맛나게 저녁을 먹고
남은 대파와 숙주는 썰어서 냉동실에 넣었고
두부와 콩나물, 햄은 언제 먹게 될지(반대로 언제 버리게 될지) 살짝 불안했지만 어쨌든 냉장고에 넣었다.
오늘 오후에 친구가 돌아갔다.
나는 집에서 쉬는 오늘이라도 해먹지 않으면 죄다 버리게 될 거란 생각에 콩나물국을 끓여서 저녁을 먹기로 선택했다.
과연 내가?라는 의구심으로 시작한 콩나물국 끓이기는 매우 흡족하게 마무리됐다.
냉장고에 있던 콩나물도 맛있게 다 먹었고, 식당밥으로 내 위장들을 괴롭히지도 않았으며, 돈도 아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문제 한가지, 음식물쓰레기 비우기.
친구가 저녁 만들어줄 때 나온 쓰레기랑 내가 오늘 떼어낸 콩나물 대가리들이 모여 있으니 양이 꽤 많았다.
식사다운 식사를 한 후에 나온 음식물쓰레기였고,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기엔 나를 불편하게 할만큼의 양이었기 때문에 분리수거통으로 들고 내려갔다.
오피스텔 이사 와서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음식물쓰레기통.
10발짝 이내로 나가가자 예상대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쩌나, 해야지 싶어서 뚜껑을 열고 털어넣기 시작했는데..응? 의외로 심각하지 않네? 그리고 센스있는 경비 할아버지가 쓰레기통 뚜껑에 손을 대고 열지 않도록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공중 손잡이'를 만들어두어서 손을 더럽힐까봐 전전긍긍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변화는 내가 헛구역질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음...
음식물쓰레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토록 구구절절 정리하는 건
오늘 사건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이다.
어린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쌓아둔 '나는 이런 애야'라는 생각들이 이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단 걸 확인했다고 해야하나?
내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주저하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겁을 내거나, 싫어했던 일들.
시간이 지나
나란 사람이 변했으면
그 생각들도 한번쯤 점검해보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내가 손해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난 무척 기뻤다.
내가 두려워하고 겁내고 반사적으로 싫어할 것이 하나 줄었으니까.
조금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의 선택.
앞으로 음식물 쓰레기 나오는 게 싫어서 밥을 사먹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리고 오늘의 발견.
환경에 대한 나의 의식은 먹고 남은 치킨 뼈다귀 수준이란 것.
 
==================
 
30분 전쯤 여기까지 쓰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문득 '뼈는 음식물쓰레기가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글로 써놓은 게 있으니 확인은 해야겠다 싶어서 검색해봤더니, 세상에 세상에!
바나나 껍질, 차찌꺼기, 뼈 이 세가지 중에 음식물 쓰레기는 바나나 껍질 뿐이란다.
역시 사람은 알고 말해야 돼.
 
오늘의 발견 추가
그동안 일반쓰레기 봉투에 버렸던 것들 중에 음식물쓰레기가 아닌 게 대부분이었다니 안심이지만, 그렇다고 환경에 대한 의식이 있다고 말은 못하겠음.
 
또 한가지 덧붙이기.
나는 확실히 말에 예민함.
2009/04/13 00:07 2009/04/13 00:07

20071221

from [선택일기] 프로젝트 2009/04/13 00:06
#1
지난 19일 대선 때, 나는 투표를 하지 않는 걸 선택했다.
내가 사는 오피스텔이 전입신고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 나의 주민등록상 주소는 은평구 고모댁으로 되어 있다.
투표를 하려면 전입 신고할 때 딱 한번 가본 고모댁 근처 동사무소까지 가야했다.
정말, 무지 많이, 심하게 갈등했다.
18일 밤까지만 해도 투표하는 쪽으로 55%정도 기울어졌던 마음이
잠에서 깨어난 19일 오후에 안하는 쪽으로 55%정도 기울어졌다.
전날 태안에서 기름을 닦았는데, 고작 서너시간 닦았을 뿐인데, 몸이 너무 무거웠다. 일이 고되었던 게 절대 아니라, 내가 운동부족이라서.
어쨌든 일어나니 만사가 귀찮아져서 집에서 니빌거리기 시작했다.
오후 5시, 대전에서 올라온 친구를 마중하러 서울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라디오를 듣게 됐다.
"아직도 투표 안하신 분들!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투표소로 가세요" 식의 선동 멘트였는데, 기분이 참 뭣했다.
첫번째 뭣한 기분은 창피함.
응, 그래, 나는 아.직.도. 투표 안한 분이야. 내가 이런 선택을 하다니 나도 부끄러.
두번째 뭣한 기분은 반발.
아니, 근데, 그럼 싫어 죽겠는데 그 먼 데까지 가야해? 너무 멀어, 귀찮아, 피곤해, '당장 하던 일을 멈추라'는 니 멘트 정말 거슬려.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선택을 한거야. 그 선택은 쉽게 구겨버려도 되는 거야? 나의 투표권과 나의 귀찮음, 둘 중 어떤 걸 더 가치있게 생각하는지, 어떤 걸 더 먼저 다뤄야 하는지, 그거 내가 고민하는 거잖아. 그렇게 쉽게 말하지마!
세번째 뭣한 기분은 비참함.
평소에 이명박이 싫으네, 삼성 이건희 일가가 어쩌네, 특검법이 어쩌네 했던 내 말들, 그 말들의 깊이가 고작 요거 밖에 안되는구나. 귀찮음이 금세 말려버려 곧 바닥을 드러내고말 깊이. 찰박찰박, 수면 아래 0.5cm의 깊이. 나는 말만 했지 그 어떤 선택도 하지 않았었구나..그렇다면 그 말들이 내 것이라고 주장할 자신이 없어. 어디가서 이명박 싫다고 큰 소리로 말하기도 쪽팔린다.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고
삼청동을 걷다가
이명박 당선 유력이라는
출구조사 소식을 듣게 됐다.
분개하고
암담해하는
친구의 말들이 쏟아지는데, 나는 그 어떤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찰박찰박, 게으름이 곧 말려버리고 말 내 말의 깊이.
 
 
#2
어제는 에단호크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오늘은 윤성호 <은하해방전선>을 보기로 선택했다.
내가 그 '뜨거운 시기'를 지나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다리를 건너서 이쪽 편으로 왔구나, 싶었다.
아빠가 된 에단호크가 자신이 거쳐온 시기 안에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그 눈빛. 그 안에 담긴 회한, 수긍, 응원, 포기, 통찰, 어쩔 수 없음..뭐랄까 서양 노인들이 "c'est la vie"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게 느껴졌다.
내가 그걸 벌써 느끼는 게 좀 서글펐다.
내가 그토록 뜨거'웠'던 순간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는 게.
<은하해방전선>은 선택으로 똘똘 뭉쳐있는 영화였다.
정치적 신념, 영화적 취향, 이래야 한다는 당위, 이러고 싶다는 소망, 그 모든 게 분명하고 명확했다. 그렇게 단단한 자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건 이 방향에서 저 방향에서 다 생각해보고 찔러보고 해부해보고 공격해봤다는 걸 의미한단 생각을 잠깐 했다. GV 시간이 약 1시간 가량 진행됐는데, 감독은 참 말이 많았다. 그리고 잘했다. 다 자기가 해봤던 생각이니까.
영화 중에 내가 옛 남자친구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대사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내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니가 말할 차례를 기다리는 것 같다"라는 말.
나도 말할 차례 기다리고 노리며 하는 말 종종 하는데 그러지 말아야지 싶었다.
말, 말, 말, 이러쿵저러쿵 하다보니
죄다 말이야기 뿐이네. 내게 말이 이렇게 중요한 거였나보다.
2009/04/13 00:06 2009/04/13 00:06

20071216

from [선택일기] 프로젝트 2009/04/13 00:05
#1
아이템 회의를 준비하러 교보문고에 갔다.
광화문역에서 교보문고로 바로 통하는 계단에는 늘 하얀 퍼머머리 할머니 한 분이 구걸을 하고 계신다. '아...오늘은 어쩌지?' 모퉁이를 돌아 그 계단이 나타날 무렵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지갑 안에 천원짜리가 있었나?' '구세군 냄비에도 넣었는데, 또 해야하나?' '진짜 춥겠다..' 
계단을 막 올라가려는데 할머니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할아버지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할아버지는 처음 보는 사람이다.
오늘은 할머니에게 돈을 주지 않기로 선택했다.
할머니를 스쳐 지나가는데 내 심장 0.001g 정도가 뭉개진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있던 싸늘한 자리부터 사람들로 북적이는 교보문고 입구까지 3-4m정도 여린 핏빛의, 선택의 발자국이 생겼다.
 
 
#2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와 <지식e>를 구입하기로 선택했다.
<나는 왜...>는 패션잡지의 편집장을 지냈던 닐 부어맨이라는 영국 작가가 쓴 책이다. 20년 동안 모아온 온갖 명품 브랜드 물건을 2006년 9월 17일 런던 한복판에서 화형시킨 걸로 유명해진 사람인데, 그가 쓴 화형 준비기&화형식 이후 브랜드 없는 삶에 대한 일기가 묶여 있었다. 브랜드와 이미지로부터 최대한 멀리 달아나서 순도 100%의 자기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반가웠다. 원래 그런 질문은 잘 하진 않지만, 앞으로 인터뷰할 때 어떤 브랜드의 옷을 좋아하나, 좋아하는 향수는 뭔가 등등의 질문은 되도록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지식e>는 축구공이 한 개 만들어지는데 1620번의 바느질이 필요하고, 전세계 수제축구공의 70%를 인도와 파키스탄 아이들이 만든다는 구절 때문에 샀다. 내 평생 축구를 직접 할 일이 생기겠냐만, 선물로라도 그런 축구공은 절대로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그렇게 선택했다.
 
# 3
밤새도록 아이템 회의를 준비해야 한다. 딴 생각 하지 말고 일을 해치우느냐, 오늘부터 써보기로 한 [선택일기]를 쓸 것이냐, 둘 중에 고민하다 일기를 쓰기로 선택했다. 이 선택으로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언지 알게 됐다.
작은 순간의 선택을 기록하다보면
그 안에 있는 나에 대한 독해힌트를 발견하게 될테고
그러면 더 큰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겠지
2009/04/13 00:05 2009/04/13 00:05